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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로(金炳魯, 1887년 12월 15일 ~ 1964년 1월 13일)는 대한민국의 법조인이자 정치인으로, 호는 가인(街人)이다. 전라북도 순창군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울산이다.

생애편집

아버지는 사간원정언 김상희(金相熹)이고, 어머니는 장흥 고씨이다. 3남매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부모가 서울에서 머물렀기 때문에 유년시절은 조부모 슬하에서 자랐고, 13세에 담양 정씨(潭陽鄭氏)와 혼인하였다. 17세 때 한말 거유(巨儒)인 전우(田愚)에게 한학을 배우고, 18세 때 담양의 일신학교(日新學校: 강습소)에서 서양인 선교사로부터 산술과 서양사 등 신학문에 접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해에 향리의 용추사(龍湫寺)를 찾아온 최익현(崔益鉉)의 열변에 감화, 1906년 20세 때 70여명의 의병과 함께 순창읍 일인보좌청(日人補佐廳)을 습격하였다. 그리고 그해 창평(昌平)의 창흥학교(昌興學校)에 입학했으며, 1910년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대학(日本大學) 전문부 법학과와 메이지 대학(明治大學) 야간부 법학과에 입학하여 동시에 두 학교를 다녔으나 폐결핵으로 귀국했다. 1912년에 다시 도일하여 메이지 대학 3학년에 편입하여 이듬해 졸업하고, 1914년 주오 대학 고등연구과를 마치고 귀국했다. 일본 유학 중에 잡지 《학지광 學之光》의 편집장을 지냈고, 한편으로는 금연회(禁煙會)를 조직하여 조선 유학생의 학자금을 보조했다.

귀국한 뒤 경성전수학교(京城專修學校 : 京城法律專門學校의 전신)와 보성법률상업학교(普成法律商業學校 : 普成專門學校의 전신)의 강사로 형법과 소송법 강의를 맡았으며, 1919년 경성지방법원 소속 변호사로서 개업했다. 변호사 시절 그는 수많은 독립운동 관련사건을 무료 변론하였으며, 다채로운 사회활동으로 독립운동에 공헌했다.

이인, 허헌과 함께, 일제시대에 유명한 3인의 인권변호사로 활약하였다. [1] 즉, 1923년 허헌(許憲)·김용무(金用茂)·김태영(金泰榮) 등과 서울 인사동에 형사변호 공동연구회를 창설하였는데, 겉으로는 연구단체임을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항일변호사들이 공동전선을 형성, 법정을 통해 ‘독립운동이 무죄’임을 주장하는 독립운동 후원단체였다.

이 연구회는 독립투사들에 대한 무료 변론뿐만 아니라 그들의 가족을 돌보는 일까지도 했다. 10여년 동안 그가 맡았던 사건 가운데에는 여운형·안창호 등에 대한 치안유지법위반사건, 김상옥의사사건(金相玉義士事件), 광주학생사건, 6·10만세운동, 정의부·광복단사건, 조선공산당사건 등이 있다. 한편 1927년이상재(李商在)의 뒤를 이어 신간회(新幹會)의 중앙집행위원장이 되었고, 광주학생사건 때는 진상조사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32년 보성전문학교의 이사로서 운영난을 타개하기 위하여 김성수(金性洙)에게 인수를 알선하였으며, 신간회가 해체되고 사상사건(思想事件)의 변론에서도 제한을 받게 되자, 1932년부터는 경기도 양주군으로 내려가 농사를 지으면서 광복될 때까지 13년간을 은둔생활로 일관하였다. 따라서 성을 바꾸지 않았고, 일제의 배급도 받지 않았다.

광복이 되면서 1945년 9월 8일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의 사법부장으로 선임되었다. [2] 잠시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 1945년 9월 21일 중앙감찰위원장이 되었고, 1946년 남조선과도정부 사법부장을 지냈다. 1948년 초대 대법원장이 되었고, 같은 해 구성된 국회 내의 반민특위 재판부장으로 선임되었다. [3] 1953년 제2대 대법원장이 되어 1957년 70세로 정년 퇴임하였다.

정년 퇴임 뒤에도 재야법조인으로서 활약했으며, 1955년 고려대학교 명예법학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960년 자유법조단대표, 1963년 민정당(民政黨) 대표최고위원과 ‘국민의 당’의 창당에 참여하여 그 대표최고위원으로 윤보선(尹潽善)·허정(許政)과 함께 야당 통합과 대통령 단일후보 조정작업 등 야당활동을 전개하였다. 1964년 1월 13일 간장염으로 서울 인현동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사회장으로 서울 수유리에 안장되었으며, 1963년 건국공로훈장 단장이 수여되었다.

권력견제편집

대법원장 재임 9년 3개월 동안 그는 사법부 밖에서 오는 모든 압력과 간섭을 뿌리치고 사법권 독립의 기초를 다졌다. 그의 사법권 독립에 대한 신념이 얼마나 확고했던가는 이에 대한 견해차로 말미암아 일어난 이승만(李承晚)과의 마찰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초대 대통령인 우남 이승만과 초대 대법원장인 가인 김병로는 곧잘 부딪쳤다. 우남이 법무부 장관에게 “요즘 헌법 잘 계시는가”라고 물었는데, 장관이 말을 못 알아듣자 우남은 재차 “대법원에 헌법 한 분 계시지 않느냐”고 물었다는 일화가 있다.[4] 이승만이 1956년 국회연설에서 『우리나라 법관들은 세계의 유례가 없는 권리를 행사한다』고 사법부를 비판하자 『이의가 있으면 항소하라』며 맞대응한 일화는 유명하다.[5]

1차 사법파동편집

김병로는 정치 권력과 심심찮게 대립각을 세웠다. 대표적인 것이 1950년 3월 국회 프락치 사건 판결. 법원은 ‘프락치’로 지목된 국회의원 13명에 대해 징역 3~10년의 비교적 가벼운 형벌을 내렸다. 이 판결과 안호상 전 문교부 장관의 국보법 위반 사건, 윤재구 의원의 횡령 사건에 대한 잇따른 무죄 선고는 이승만 대통령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6] 1952년 부산정치파동 직후 대법관들에게 “폭군적인 집권자가, 마치 정당한 법에 의거한 행동인 것처럼 형식을 취해 입법기관을 강요하거나 국민의 의사에 따르는 것처럼 조작하는 수법은 민주 법치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이를 억제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사법부의 독립뿐이다.”라고 강조하였다.

그에게 있어 사법권의 독립과 재판의 독립성은 한치도 양보할 수 없는 절대명제였다. 한국전쟁 때 다리가 절단되었으나 의족을 짚고 등원할 만큼 강인하고 강직한 성품이었으며, 세태의 변전에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은 곧은 절개는 후인들에게 깊은 감명과 교훈을 주고 있다.

가족편집

초대 국회의원을 지낸 김문평(金汶枰, 1905년 - ?)이 김병로의 사위이고[7] 윤영철 헌법재판소장[8]은 손녀 사위이다.

기타사항편집

남북 분단에 맞서 좌우 합작을 추진했고, 토지개혁을 외쳤다.

이승만 정권 하에서 사사오입 개헌의 불법성을 역설하고, 보안법 개악에 반대했다.

2001년,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街人) 김병로(金炳魯·1888∼1964)선생의 평전이 민음사에서 출간됐다.[9]

한국법조삼성(三聖)기념사업회(상임공동대표 이치백.李治白)는 1999년 12월 3일 전북 전주시 덕진공원에서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街人) 김병로(1887∼1964)선생과 서울고검장을 지낸 화강(華剛) 최대교(1901∼1992)선생, 서울고법원장을 지낸 김홍섭(1915∼1965)선생의 동상 제막식 가졌다.[10]

‘부정을 행하기보다는 굶어서 죽는 편이 영광’이라는 명언을 남겼으며, 평생 한복을 입고 지낸 그는 사법의 기초를 다졌고 법전 뿐 아니라 3심 제도와 법복에 이르기까지 사법행정의 제반사를 정한 ‘사법부의 수장’이었다. 가인은 가구조차 없이 살았고 이승만 대통령의 노여움을 아랑곳하지 않고 김종원 치안국장의 손아귀로부터 김선태를 석방시켰다.[11]

법조계에선 가인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을 정부의 압력과 간섭에 맞서 사법부 독립과 권위를 지켜낸 「법조인의 모범적인 표상」으로 꼽는 사람이 많다.


전 임
초대
제1대 대법원장
1948년 8월 - 1957년 12월
후 임
 조용순 

틀:2004년-이 달의 독립 운동가

참고자료편집

  • 《한국의 명가(韓國의 名家)》(一志社, 1976)
  • 《한국근대인물백선(韓國近代人物百選)》(東亞日報社, 1979)
  • 《역대위인실록 하(歷代偉人實錄 下)》(敎育週報社, 1983)
  • 《가인 김병로 평전 : 민족주의적 법률가, 정치가의 생애》(김학준, 민음사, 2001)
  •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주석편집

  1. 인권의 역사, '역사가 이들을 무죄로 하리라' [브레이크뉴스] 2003-12-09
  2. 허은, 〈8·15직후 민족국가 건설운동〉,강만길 외, 《통일지향 우리 민족해방운동사》(역사비평사,2000)307~308쪽.
  3. 국회 내의~ : 민족정기의 심판
  4. [동아광장]“요즘 헌법 잘 계시는가” [동아일보] 2004-11-24
  5. 심층취재;한국의 대법원장 [조선일보]1999-08-19
  6. 대법관 10명 1년내 교체…대법원 변화中 3차례 사법파동 ‘영욕의 56년 [문화일보] 2005-07-16
  7. 《내가 겪은 민주와 독재》(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2001년)
  8. 탄핵 열쇠 쥔 헌재 재판관 9인 면면은 [조세일보] 2004-05-14
  9. 초대 대법원장 김병로선생 평전 나왔다 [서울신문] 2001-03-23
  10. 법조인 김병로-최대교-김홍섭선생 동상 건립 [세계일보]1999-12-03
  11. 만물상 [조선일보]1999-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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