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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옥(趙炳玉, 1894년 5월 21일 - 1960년 2월 15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정치가이다. 본관은 한양, 호는 유석(維石)이며 충청남도 천안시에서 태어났다.

1914년 연희전문을 졸업하였다.

연희전문에서 5년 동안 교편을 잡았고, 이후 독립운동의 길에 들어섰다. 1927년 신간회 에 참여하여 총무부장이 되고, 1929년 광주학생운동을 규탄하는 민중대회를 열어 한용운 등과 1년 동안 옥살이를 하였다. 그 뒤 안창호가 지도하는 흥사단에서 활동하다가 또다시 옥고를 치렀다.

1945년 광복 직후 김성수, 장덕수 등과 한민당을 조직하여 반공, 반탁을 기치로 내걸었다. 이후 미군정하에서 1945년(발령은 1946년 1월 13일이었지만, 이미 1945년 10월부터 그 자리에 내정돼 있었다)부터 1948년까지 경무국장을 맡아 수도경찰청장 장택상, 검찰총장 이인, 대법원장 김용무와 더불어 좌익 척결을 주도하였다. 정부 수립 후 1953년 내무부장관이 되었으며, 같은 해 민의원에 당선되었다. 1955년에는 민주당을 조직하여 1956년 대표최고위원직을 맡았다. 1960년 제4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선거를 불과 며칠 남겨두지 않고 신병으로 별세하였다. 이 선거에서 이승만이 이끄는 자유당부정선거를 저질러 4.19 혁명을 불러일으켰다.

국회 부의장을 지낸 조윤형새천년민주당 대표를 지낸 조순형이 그의 아들들이다.

상세한 연보[]

  • 1946년 12월 2일 조미공동위원회에서 자신을 비방한 최능진에게 국립경찰의 협화와 명령계통의 확보에 유해하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들어 사직을 요구함.
  • 1947년 7월 7일 우익에 의한 테러 사건이 민족적 애국단체의 공동방위적 입장에서 출발한 행동이라는 담화 발표.
  • 1948년 4월, 5·10선거를 앞두고 선전과 동원을 위해 경찰보조대인 향토보위단(약칭: 향보단)을 백만명 규모로 조직하였다.
  • 1948년 5월 5일, 군정장관 윌리엄 딘의 주도로, 민정장관 안재홍, 경무부장 조병옥, 경비대사령관 준장 송호성 등이 제주를 방문해 제주 4.3항쟁에 대한 비밀회의를 가졌다.
  • 1948년 9월 1일 대통령 특사 단장으로 17개 자유우방국에 파견되어 대한민국 정부 승인을 요청하였다.
  • 1953년 이승만이 반공 포로를 일방적으로 석방하자, 조병옥은 이승만이 유엔 정책에 반하는 지나친 행동을 했으며 외교상의 큰 손실을 가져올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 발언이 널리 알려지면서 조병옥을 규탄하는 벽보가 나붙었다. 조병옥은 급기야 심야에 테러까지 당했다. 그는 쇠뭉치로 머리를 맞아 실신했다. 조병옥은 응급 치료를 받은 뒤 수원으로 피신했으나 6월 25일에 연행되어 서대문 육군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약 한 달만인 7월 20일 풀려나긴 했지만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함으로써 기억력을 거의 상실해 한때 폐인이 될 위기마저 겪었다.[1]

참고 자료[]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54, 106, 123, 147쪽

주석[]

  1. ^  1953년 이승만이~위기마저 겪었다.: 이영석, 《야당40년사》(인간사, 1987),82쪽; 백선엽,《군과 나: 백선엽 회고록》(대륙연구소 출판부, 1989),278쪽.
전 임
백성욱
제5대 내무부장관
1950년 7월 - 1951년 5월
후 임
 이순용 
전 임
(대구시 갑)조경규
(대구시 을)박성하
(대구시 병)이갑성
제3대 국회의원(대구시 을)
1954년 5월 31일 - 1958년 5월 30일
민주국민당
(대구시 갑)서동진
(대구시 을)이우줄
후 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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